2010-05-14 오전 1:38:53 Hit. 995
어느 햇살 따사로운 봄날입니다. 소년과 소녀가 강가로 나갔습니다. 하늘은 푸르며 맑았고 나무마다 연초록 잎새들이 꿈결처럼 반짝이는 더 없는 날이었지만, 소년의 얼굴은 몹시 슬퍼 보였습니다. 집안 사정으로 살던 곳을 떠나야 하고 무엇보다 소녀와 헤어지기 싫었던 거지요.소년과 소녀는 말없이 흐르는 강물만 보고 있었어요. 쏟아지는 햇살은 물에 닿자마자 은어가 되는지 강은 수만 마리의 은어 떼가 헤엄치며 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은빛 강물이 흐르는 소년의 눈을 보며 소녀가 조그맣게 말했습니다. "햇살이 참 좋다. 그치? 우리, 햇살 언약식 할까?" "햇살 언약식?" "나만 따라하면 돼." 소녀가 먼저 손바닥을 펴 내밀었습니다. 소년의 손이 조심스럽게 얹혀졌습니다. 소년의 손등 위로는 햇살이 가득 내리고 있었습니다. "햇살 아래 맹세하오니 햇살이 비치는 한 언제라도 희망 잃지 않고 살겠으며, 햇살처럼 우리 우정 영원히 변치 않겠습니다." 소녀의 말 마디마다 소년이 주문 외듯 천천히 따라했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정든 곳을 떠난 소년은 낯선 곳을 떠다니며 고생도 참 많이 했습니다. 어디에서도 봄은 오고 또 갔지만 따뜻했던 그날의 햇살은 아니었습니다. 소년은 그날의햇살을 간직하며 살았습니다. 아니 햇살의 언약을 믿으며 살았지요. 소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년은 떠났지만 소녀의 가슴엔 소년이 늘 함께 살았으니까요. 해가 바뀌고 또 바뀌고 둘은 이제 더 이상 소년 소녀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움과 기다림이 그만큼 커져 갔지만 누구도 내색하진 않았습니다.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야 해.' 먼 곳의 소년이 생각했습니다. '나보다 더 고운 사람 만나서 행복해야 해.' 남아 있는 소녀도 생각했습니다. 도심을 벗어나자 고속버스 유리창으로 햇살이 밀려들어왔습니다. 모두들 커튼을 내리느라 부산했지만 태수는 햇살의 입자를 받아내려는 듯 해살 아래 손바닥을 내놓았습니다. 따스하고 따스했습니다. '좋은 사람 만나 잘 살고 있다면 행복을 빌어주리라. 만약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강가에 가서 햇살 언약식을 다시 해야지. 우정을 사랑으로 바꾸어.........' 어느 해 봄이고 새롭지 않은 봄이 있느냐고 했지만 태수 씨에게 올 봄은 정말 특별합니다. 비로소 길고 지루했던 그림움과 기다림을 벗어 봐도 될 만큼 당당해졌기 때문입니다. 참으려 해도 자꾸 웃음이 나왔습니다. 손바닥을 든 채 슬몃슬몃 웃는 그를 옆 사람이 이상한 듯 바라보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태수 씨는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습니다. 태수 씨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공중전화로 달려갔습니다. 국번이 두 번이나 바뀐 오래된 전화번호를 떠올렸습니다. 숨을 고르며 천천히 버튼을 눌렀습니다. "여보세요. 거기 혹시 소희네 집 맞나요?" "맏는디요, 근데 댁은 뉘시오?" "저, 아는 사람인데 소희 있으면 바꾸어 주세요." "소희는 여기 없는데......." 태수 씨의 가슴이 쿵 내려 앉았습니다. "그럼, 그럼 .........혹시, 결혼........." "소흰 병원에 있슈." "..............." 태수씨의 가슴이 온통 다 내려앉았습니다. 태수씨는 생전 처음 예쁘게 리본을 맨 놀아 프리어 한 다발을 샀습니다. 바람도 없는데 가슴 앞자락의 꽃잎이 흔들렸습니다. 실은 가슴이 떨리고 있었던 거지요. 병원 계단을 오르는데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뎠습니다. 심호흡을 하고 병실 안으로 들어섰지만 동그렇고 통통한 얼굴에 붉은 귀여웠던 소희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밖에라도 나간 걸까?' 되돌아 나가려는데 얼굴이 한 점 핏기도 없이 깡마르고 초라해 보이는 여자가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저, 혹시 태수?" "아니, 그럼 네가 소희?" 둘은 한동안 부둥켜안고 있었습니다. 두 어깨가 멈출 줄 모르고 들썩였습니다. "태수야, 이제 얼굴 보았으니까. 됐어. 더 바랄게 없어." "소희야, 미안하다. 정말 정말 몰랐어." 태수 씨는 소희씨를 데리고 병원 뜨락으로 나갔습니다. 여전히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태수씨가 손을 펴 내밀었습니다. 힘들고 든든해 보이는 손이었지만 소희씨는 태수씨의 손바닥 위에 손을 얹지 않았습니다. 태수 씨가 가녀린 소희 씨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손에다 얹었습니다. 창백한 소희 씨의 손등에 햇살이 금가루처럼 눈부시게 쌓여 갔습니다. 태수 끼가 오래된 기억 속의 싯귀를 낭송하듯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햇살 아래 맹세하오니 햇살이 비치는 한 언제라도 희망 잃지 않고 살겠으며, 햇살처럼 우리 사랑 영원히 변치 않겠습니다." "소희야, 이제 너에게 흐린 날은 없어. 내가 네 안의 햇살로 있을 거야." 태수씨가 종이 인형같이 얇아진 소희 씨의 등을 하염없이 쓸어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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