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X년12월8일눈 쏟아짐.
그가 고민을 털어놓았다.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데,그 사람 마음을 도무지 모르겠다고,
제기랄,그따윈 집어치우고,나와 사랑을 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여느 때처럼 난 "시간을두고서
잘생각해 결정하세요,형" 하며 있는대로 점잖고 사려깊은 척,위선의 가면을 쓰고 웃었다.
늘 그런식이었다.그를 알아 온 지난 2년 동안 늘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난,그의 말이라면 뭐든지 사사건건 따지려 들었고,그의 말꼬리를 잡고 배배 꼬았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치게 될 때도 난 절대 먼저 아는 척 안했다.하나도 반갑지 않은 것처럼
표정관리에 힘썼고,그보다는 그의 주변사람들에게 말을 걸고,조금도 관심없는 그들의 얘기에
너무 재미있다는듯 깔깔 거리며 웃었다.그가 들으라고, 더 크게 깔,깔,깔,난 형한테
관심없어,깔깔깔깔,
보라구,이렇게 형 외의 다른 사람얘기에 더 행복해서 웃고 있잖아!깔,깔,깔,깔,깔,깔 그러나 그
오만스런 웃음소리에도,제발 질투 좀하라는 그 웃음소리에도,그는 빙긋이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니?나도 한번들어보자"
그 소리에 난 저혼자 부풀어 오르던 풍선이 바람빠지는 것처럼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으이구,이러니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미워 할 수 있겠어!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처음 만난 그
날부터 그는,학교 후배라며 날 무작정 아껴주었다.그 한없는 친절함에 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하지만 이후,계속되는 나의 수작에도 전혀 질투 하지 않는 그 친절함을 보면서,난
한없는 그 친절함이 바로 나에 대한 한없는 무감정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나의 사랑은
절망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날, 그는 어학 연수를 간다고 했다.기간은 1년이었다. 그 기간동안 그
누군가에 대한 감정을 정리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변하지 않는다면 ,정식으로
프로포즈도 할거라고. 그 말은 곧 나에게 사형 선고였다.완벽히 고래 싸움에 새우등짝 터진
꼴이었다. 그 잘난 누군가 때문에, 나는 원치도 않던 생이별을 하게 된 셈이었다. 그의 마음은
어떻게 해 볼 수 없다 쳐도,이제 그의 모습마저 볼 수
없다니,흑흑,해삼,멍게,말미잘,불가사리....아,개같은 내사랑.
그가 떠나던 날,난 그의 친한 무리들 속에 뻘쭉하게 서서 그를 배웅했다.그는 우리들에게 이별의
선물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야,너 겨울이 생일이지?그땐 내가 여기 없으니까 특별히 넌 생일 선물로 준비한거야,생일날 꼭
풀어봐!크기는 작아도 이게 젤 비싼거다."
사기꾼처럼,그가 빙긋이 웃었다. 거짓말!제일로 비싼거라고?흥!크기가 작으면 작아서 미안하다고
해,내가 크기 갖고 뭐 섭섭해 할 것 같애? 속으론 그랬지만,내심 섭섭했다.다른 사람들 것에
비하면,내건 진짜 좁쌀만했으니까, 그게 아닌 줄 알면서도,선물의 크기가 마치 우리들 각자에
대한 그의 애정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만 같아`섭섭했다`.아주 많이.
그가 떠나고,다른 사람들이 커피나 하고 가자는걸 집에 급한 일이 있다고 빠져 나왔다 택시를
타고,시내로 나올 때까지도 그냥 그렇던 가슴이 파아란 하늘을 가로지르며, 유영해가는 비행기를
보자,그만 울음을 토해냈다.엉엉엉,지랄같고,빙신 같고,바보 같은...내사랑.
몇 달 뒤,그때 배웅했던 무리들 중의 한 사람으로부터의 전화가 걸려왔다.
"저...XX이가 죽었대."
암벽등반을 하다 당한 실족사라고했다. 그 어이없음이라니,`어학연수`와`암벽등반` 이라는 절대
양립할수없을것같은 두 단어의 함수관계에 아연실색하며,하마텨면 전화기 저편상대에 대고
`하하하하`폭소라도 터뜨릴 뻔했다.
제기랄,이후,난 그를 잊기로 작정했지만 그게 또 잘되지 않는 거였다.차마 고백하지 못했던
말들은 내맘속에 또아리를 틀며, 그 도도하던 자존심에 상처를 긋기 시작했다. 내 생일날이
돌아왔다.아침부터 창가엔 눈이`펑펑`쏟아지고 있었다.첫눈이었다. 길조라며 친구들은
축하한다고, 부어라 마셔라 좋아들 했지만 내마음은 온통 내방 책상맨밑 서랍속에 놓여있는 그의
생일 선물에 가 었다.결국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나는 서둘러 술자리를 빠져 나왔다.만일,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아마 난 오늘이 오기전에 선물을 풀어봤을지 모른다.하지만,그가 죽고 나니
그건 그와 내게 남아있는 유일한 연결고리가 되어 버렸다.그 마지막 고리를 난,서둘러 풀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지하철에서부터 조급했던 마음은 역에 내리자마자 날 다그쳐 뛰게
만들었다.헉헉,집으로 달려와서,방문을 열고 책상으로 달려가,맨 밑의 서랍을 열고 선물을
꺼내들었다.헉헉,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A.S.T.R.A라는 상표가 곱게 찍힌,만년필이었다.그렇게
아껴두고,기다리고,고대했던 선물이 고작 만년필이라는게 조금실망했고, 이제 이것으로
그와나를 연결하는 모든것이 끝나버렸구나생각하니 눈물이`핑`돌았다.
기적이라도 바랐던것일까??휴우..만년필을 만지작거리자니,영화 러브레터의 여주인공처럼,죽은
애인에게 편지를 쓰고싶어졌다.
살아 생전 애인이라고,사랑한다고 단 한번도 불러보지못했던`그`이지만..... 편지지와 잉크를
가져왔다.만년필뚜껑을 열었다.순간`툭`하고 뭔가가 떨어졌다. 뚜껑안쪽에 동그랗게 접혀있던
메모지였다.
심장이 `쿵쿵`뛰기시작했다.아니,미친년 널뛰듯했다.심호흡을 하고,눈을 질끈감고, 떨리는
손으로 메모지를 펼쳤다.감은 눈을 뜨자,너무나도 낯익은 그이 글씨체가 날아와 박혔다.........
"귀.국.하.면.우.리.함.께.살.자."
창밖엔 하염없이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