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은 사랑을 증오와 집착으로 만들고....
그 사랑은.. 철저히 이기적인 사랑이 되어버린다...."
갑작스런 정미의 죽음 소식을 듣고 난 그저 망연 자실할 수 밖에
없었다. 정미가 죽었다니.... 정미에게 죽음이란게 찾아오리라는
것은 미처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것이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지
난 1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정미를 알게 된 것은 15살 때였다......그 시절 내 친구의 옆집에
살던 정미는 귀엽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가진 아이였다.. 우린 그
렇게 순수하게 작은 사랑을 키워갔다..한살 어린 정미는 나를 무
척 따랐고..항상 나에게 자신감을 주는 아이였다..
그러던 우리 사이에 어색한 틈이 생긴 것은 순전히 나의 책임이
라고 할수 있다..20살이 되던 해..우연히 길을 걷다 나는 어느 영
화 감독의 눈에 띄었고....그해 나는 정말 갑작스럽게도 "젊은 녀
석"이란 영화로 대종상 신인 남자 연기상을 받게 되었다..
그 후 나의 인생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그저 날 불쌍한 백수로만 보시던 아저씨 이줌마들의 시
선부터가 달라졌고..맨날 밥만 축낸다고 구박하던 울 엄마 아빠
의 행동도 달라졌다..뿐만 아니라 나때문에 아파트 값이 올랐다
는 신문 기사도 났고...주변엔 항상 젊은 여자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버스비도 없어 장거리를 걸어다니던 내게 텔레비젼 에서
나 볼수 있던 멋진 차도 생기고.. 한마디로 난 갑자기 스타가 되
었다..나도 모르게 그렇게....
영화배우 강찬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니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강 찬의 여자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오래
된 여자친구인 정미가 있었지만..매스컴의 생리를 알게 된 나는
정미를 세상에 공개할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내가 정미를 내 여자친구라 밝히지 않는 것은 내가 아닌 정미를
위해서라고....
차츰 정미와 통화하는 횟수도 줄게 되고..만나기는 더더욱 힘들
어졌다..가끔 내 차안이나 그녀의 집에서 정미를 만날때면 정미
는 그런 내가 못 마땅 스러운듯..항상 투정을 부리곤 했다...물론
처음엔 나도 그런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나 역시 그녀
를 자주 보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못하는 걸 이해 못해 주는 그녀
가 조금은 야속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얼마후.. 난 텔레비전 특집극에 출연하게 되었고 사상 최
대의 대작이라는 "모래 시간" 을 촬영하기 위해.. 호주로 가게 되
었다.. 가기 전에도 대본 외우랴 국내 촬영이다 엄청 바쁜 나날을
보낸 나는 미처 정미에게 조차 연락을 하지 못하였다....
출국을 하루 앞둔 날... 그날도 난 세트 촬영으로.. 거의 새벽녘에
야 지쳐서 집에 올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15층에 멈추어 있었
고..난 4층이니 그냥 계단을 이용하기로 하고 터벅터벅 올라가고
있었다... 근데.. 바로 그 계단에 정미가 와 있던 것이었다...
난 깜짝 놀라서 정미를 다그쳤다...
"너 웬일이야? 지금 몇신줄이나 알아? 그리고 이런 너 누가 보
면 어쩔려구...."
"흥... 그래 누가 알아버릴까 그러는 거야? 내가 오빠 친구라면
안되는 거냐구? 우리 본지가 얼마나 된 줄이나 알아? 내 생각
해 봤냐구? 왜 내가 오빠 출국하는걸 신문을 보고 알아야 하는
거야? 차라리 끝내자구 그래.....흐윽.....흑.흑."
그녀는 나를 보자 다짜 고짜 퍼부어 댔다...
"정미야.....조용히 얘기하자...."
그 곳이 아파트 비상 계단이었기 때문에 난 그녀를 조용한 곳으
로 데리고 갔다.. 정미의 말.... 모두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녀는 왜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지... 순간 그녀와 이대로 끝내
버리고 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난 할일이 넘 많았고.. 처음엔
장난으로 시작한 이 일에..이제 열정이 싹트고 있었기에.....
하지만 그녀와의 지난 일을 생각하면 차마 그럴수 는 없는 노릇
이었다.. 첨에 그녀를 보고 난 얼마나 가슴이 두근 거렸던가....
어쩌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건 그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었다.. 순수하고 착한기만 하던 정미가 이렇게 화를 내는것도 다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미안해 지기까지 하엿다....
그래서 난 그녀에게 다시금 나에 대한 이해와 협조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정미는 조금씩 나를 이해해주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잖아...난 널 제일 사랑하는 거......"
그러자 그녀는 흘리던 눌물을 훌쩍이며..말했다..
"그럼 증명해 줘..내가 들었는데...사랑하는 사람끼리..하얀 천
에 오른 손 검지 손가락을 잘라서 붉은 핏방울을 세번 떨어뜨
린 다음 서로 그천을 간직하고 있으면.둘은 절대 헤어지지 않
는대.. 또 둘중 한명이 죽더라도 그 나눠가진 서로의 피가 부르
기 때문에 죽음도 뚫고 만날 수 있다고 하더라..오빠 나 사랑한
다면 그렇게 해줘....."
난 정미의 얘기를 듣고 좀 섬짓해 졌다... 하지만 꼭 해달라며 준
비해 온듯 가방 속에서 하얀 천 두 개와 면도칼까지 꺼내는 그녀
에게 난 차마 거절의 말은 못했다..까짓꺼...장난 인데 뭐....
"그래 좋아... 증명해 줄께....."
면도칼로 손을 긋는 순간 뜨거운 피가 올라오는 것이 뭔가 기분
나쁠 만큼 섬짓 했지만.. 정미가 그 천을 받고서야 웃음을 보였기
에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애써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난 다음날 호주로 출국하였다........
3개월간의 시드니 촬영은 스케쥴이 너무 빡빡해서 정말 정신이
하나두 없었다..그리고 촬영마치고 와서도 여기저기 방송출연하
랴.. 또 드라마가 시작되고 나선 종전에 없던 드라마 히트와 더
불어 "모래시간" "강찬 신드롬" 까지 불러일으키며 난 최대의 전
성기를 맞았다.. 어디서든 강찬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난 인기와 돈을 원한 만큼 얻게 되었다..
가끔 정미를 생각했지만...잠시라도 짬 이 나면 난 그 시간을 이
용해 부족한 수면을 취해야 했기에..정미를 만나기는 정말 힘들
어 졌다.. 그녀는 가끔 호출기에 음성으로 자신의 생활이며..나에
대한 모니터를 남겼으며..그러다가도 연락이 없는 나에게 볼멘
투정을 남기고는했다.
그날도 난 늦게 까지 토크쇼 촬영을 하고 새벽이 다 되어서야 집
에 돌아왔다 ..지친 나머지 샤워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웠는데 전
화벨이 울렸다..정미였다....
"오빠..낼 내 생일인거 알지? 아직 날 사랑한다면..우리 첨 만난
거기로 6시까지 나와.....꼭......(딸깍..)"
정미는 내가 하는말은 한마디도 듣지 않고 그냥 끊어 버렸다...
어쩌지...낼은 나우 신문사와 중요한 인터뷰 약속이 있는 날이었
다.. 전화를 할까~ 이런 저런 생각만 하던 난 갑자기 졸음이 밀
려와 그냥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날..난 전날의 정미의 전화는 전혀 기억도 못하고 정동에 있
는 나우 신문사로 향하고 있었다..인터뷰는 길어졌다..신문사 기
자의 시시콜콜한 질문에 가능한 성실히 답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
는데 삐삐가 울렸다..
"삐삐삐삐~~~ 삐삐삐삐~~~
666 666 666 666 666 666"
뭔가 기분 나쁜 장난이었다..난 전혀 개의치 않고 인터뷰에 임하
고 있는데 계속 그 번호로 삐삐가 울렸다.. 젠장할... 난 삐삐를
집어 던지려다가 그냥 꺼버렸다..좀 변태스러운 극성팬의 장난이
겠지....
그날도 난 늦게 까지 인터뷰와 잡지 촬영을 하고 새벽녘에야 집
에 들어올 수 있었다. 들어오는 나를 어머니께서 다급히 부르셨
다....
"얘..찬아,,,너 삐삐두 안되구 ..하루종일 기다렸다... 정미가 죽
었다구 연락이 왔어.. 그 어린 것이......"
난 그제서야....정미와의 약속이 떠올랐다....이런 일이....
정미의 사인은 교통사고 였다.. 정미가 타고 있던 택시 운전사가
옆에서 깜빡이도 안켜고 들어오는 차를 보지 못해서 사고가 일어
났다고 했다..그런데 차의 운전석 부분이 부딪힘에도 불구하고
운전사는 타박상하나 없이 멀쩡했고..정미는 죽은 것이다..사람
들은 모두 의문스러워 했으나.. 부딪힐 때의 충격으로 인한 심장
마비라는 진단이 나왔다..
정미는 화장을 했고 난 정미를 뿌리는 자리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나도 며칠간은 충격으로 아무것도 못하고 집에만 있었다.
나에겐 정미의 죽음 그 자체보다 정미 어머님의 말씀이 더 충격
이었다....
"그것이..지 죽는 그날...내가 방청소하다 이상한 걸 하나봤거든.
하얀 천에 피가 묻어 있었는데..내가 그걸 버리려구 하니 펄쩍
뛰는거야...그러면서..그걸 제 가슴속으로 묻어넣더라구......흑
흑..우리 정미가 이럴줄 누가 알았겠나.."
그래....그 천... 언젠가... 몇년전인가.. 내가 시드니 가기전에 정
미와 했던 의식이 기억이 났다...흰천에 서로의 피를 떨어뜨리면
피가 서로를 불러서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다고....어디 있더라...
나에겐 그 천이 없었다..
아마 시드니에서 어딘가에 빠뜨린 듯했다...
차츰 시간이 흐르고 정미의 죽음도 조금씩 잊혀져 갔다...
"모래시간"의 히트로 여기저기서 강찬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
졌다. 처음엔 오락프로며 퀴즈쇼등에도 불러주기만 하면 갔었는
데..이젠 어느정도 내 관리를 해가며 신중히 출연을 결정했다.그
게 방송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꼭 필요했다.. 스스로의 관리가
없으면 도태되는게 이곳의 현실이었다..하다못해 작은 스캔들이
라도 터지면 그날로 방송일로 밥벌어 먹기는 글러 버린거다...
1년 전 내가 정미의 장례식에 얼굴을 보이지 않은것이 지금은 참
잘한 일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 강찬은.. 오로지
묵묵히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여자에 별로 관심이 없는 터프가이.
겸손하면서도..당당한 그런 남자였다..
경부 고속도로가 이렇게 멀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밤촬영으로 며칠이나 밤을 샜더니만 얼굴도 말
이 아니지만 입안도 까끌거리는 듯했다... 어제도 새벽까지 세트
촬영하고 밥먹을 새도 없이 또 이렇게 지방 촬영때문에 부산으로
가기위해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빨리 도착해서 우선
몇시간 자야지...아까부터 내 머릿속엔 이런 생각 밖에 없었다..
"삐삐삐삐~~~ 삐삐삐삐~~~
666 666 666 666 666 666"
"삐삐삐삐~~~ 삐삐삐삐~~~
666 666 666 666 666 666"
이런 젠장할...기분 나쁜 삐삐였다....난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도
6자를 싫어했었는데 삐삐를 꺼서 아무대나 휘익 던져 버렸다...
가금씩 이런 삐삐가 오는데 올때마다 무척 기분이 상해 버린다..
서울로 가는대로 기필코 삐삐 번호를 바꿔야 겠다......
토요일 아침인지라 고속도로는 많이 막히고 있엇다...제길....
차가 도통 가지 않으니..잠만 쏟아지고... 결국은 휴계실에서 한
시간만 눈을 붙이고 커피나 한잔 한 뒤에 가야겠다는 결론을 내
렸다. 어차피 부산을 논스톱으로 가긴 무리이고 지금이 적당히
쉴때 인듯 싶었다.
한산한 곳에 차를 세운뒤 잠을 청했다..오래 동안 자지 못했던지
라 등을 붙이자 마자 잠이 쏟아졌다...몇분이 지났을까.. 기분나
쁠 만큼 차가운 촉감이 느껴져 눈을 떴다.
누군가 나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는데..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운
입술이었다.
누굴까.....
이럴수가.......
나에게 키스를 하는 차가운 입술을 가진 여자는 정미였다....
그리고 정미는 분명히 죽었다...이런 일이.....
난 순간 꿈을 꾼 것이라 생각했지만 분명 꿈은 아니엇다..그리고
그 여자는 분명히 정미였다.. 정미는 죽었는데 그럼 이 여자는 귀
신이란 말인가..너무나도 섬짓한 느낌에 난 그 여자를 바라볼 수
조차 없었다..
분명 생김새는 정미였다.....
곧 정미는 다시 내게 입을 맞추어 왔고... 기분 나쁜 차가움에 난
몸서리를 치며 정미를 떨치려 했지만 뭔지 모를 힘이 날 그대로
위축되게 하였다...
"오빠....나는 이렇게..오빠앞에 나서고 싶지 않았어...."
정미는 가슴 속에서 예전에 우리가 하였던 의식의 증거인 피가
묻은 하얀 천을 꺼내며 말문을 열었다....
"이거 기억나...? 언젠가 내가 그랬었지..사랑하는 사람들이 하
얀 천에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피를 세 방울 떨어뜨려 서로
교환하면.. 절대 헤어지지 않는다고 ...한사람이 죽더라고 서로
의 피가 부르기 때문에 만날 수 있다고 ........
난 죽었어....그렇지만 아직도 난 오빠를 사랑해....
난 죽음도 갈라놓지 못할 우리의 증거물이 있었기에 죽어서도
슬퍼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저 조용히 오빠를 만나고 돌아가
려 했었지... 하지만 난 오빠에게 갈수 없었어....왜냐구?
날 부르는그 천이 있어야 하는데.. 오빤 그걸 갖고 있지 않았으
니까...
난 오빠 곁을 맴돌기만 하구 갈 수는없었지...난 사고로 죽었지
만..오빠가 그 천을 잊어버렸을때 이미 나를 죽인거야.... 난 오
빠에게 갈수 없지만....오빠는 나에게 올수 있다는걸 알게 되었
어..나는.. 이천을 아직까지도 간직하고 있으니까...
그날 이후로 한번도 가슴에서 꺼내어 본적이 없었어..
우린 이제야 만난거야....난 오빠를 영원히 놓지않아....
오빠를 미워하가도 하고 증오도 했었지만 ....
이제 이렇게 영원히 내 곁에 있게 되었으니......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
았다.. 그리고 정미가 곧 다시 나에게 입을 맞추었을때.. 차가운
정미의 입술만큼 나역시 차가워지고 있다는것이 어렴풋이 느껴
졌다...
그리고 ........끝이었다....
"인기 절정의 영화배우겸 탤런트 .. 강. 찬. 의문의 죽음....... "
그리고 이런 기사가 덧붙여 있었다...
"외상이 전혀 없는 걸로 보아 심장마비와..연일 계속되는 촬영
으로 인한 과로사라는 추측이 엇갈리고 있으나....검찰이 현장
인 강찬의 차안에서 이상한 물건 발견.........
핏방울이 묻은 하얀 천이 죽은 강찬의 손에 꼭 쥐어져 있었다
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