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마음을 알고는 있습니다.
당신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당신의 마지막 연인입 니다'라고."
제발 저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묻지 말아줘요. 공원의 붉
은 너도밤나무와 벤치에 대해서 얘기하라는 건가요? 그리고
죽음의 나라로 떠나버린 엘리제에 관해서도요? 또 마리아나
그밖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랑 이야기라도 하
라는 것입니까?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나를 사랑해주었던 여자
도 많았고, 또한 내 사랑을 외면했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자들도 많았지요. 그 중의 누가 더 나를 고통스럽게 했는
지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
나의 아득한 청춘과 문학의 하늘에 밝은 꿈처럼 신비롭게
떠 있던 최초의 별들은 마리아, 엘리제, 릴리아였습니다.
그녀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이 세 사람에게 받은 아픔도, 야성적인 엘레노르
한 사람에게서 받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나를 사랑했습니다.
엘레노르! 그 이름부터 감미로우면서 새침하고, 오만하면
서도 아름답습니다. 언젠가는 그녀에 대한 노래를 부를 것
입니다. 황혼, 늦여름, 보석 빛깔의 짙푸른 하늘‥‥‥‥
별들은 따사로운 하늘에서 말없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
리 두 사람, 나와 엘레노르는 붉은 장미 꽃잎 아래에서 서
로의 사랑이 마음 속 깊이 충족되지 않음을 알고 달콤한 괴
로움을 느꼈습니다.
엘레노르! 우리는 언제나 마지막을 예감했으면서도 도저히
우리들의 사랑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나. 그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여름날 밤, 철늦은 노란 장미꽃과 붉은 나뭇
잎들 사이에서 고통을 웃음으로 감추며 헤어졌습니다.
나는 그 일에 대해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인
생에 관해서, 즉 인생은 잠에 취한 사람의 몸짓 같은 것이고,
작은 파도의 출렁임 같은 것이며, 또한 삶을 살아간다
는 것이 그리 가치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느끼게 된 것은 힘
들었던 날 이후입니다.
그보다는 다른 여자들 이야기를 하고 싶군요. 그녀들은 결
코 나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연민을 보냈을 뿐입니
다. 그런 연민이 끔직하고 친절한 여인의 눈에 나타나면 견
딜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우면서도 잔인하게 보이는 것입니
다.
그 중의 한 사람은 내 사랑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이해해
주었고, 그것이 나를 부드럽게 안아주는 것 따위로서 진정
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시인의 사랑, 사람들은 그것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시의
고뇌나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로 존중할 리 없습니다. 그것은
시일뿐이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의
시작부터 즐거움을 단념하고 아예 이룰 수 없는 것으로 여
기며, 그것을 동경과 꿈을 위해 별의 세계로 승화시키는
것‥‥‥ 어떻게 그들이 이런 것을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인생이 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시간의 얼굴
위에 생기는 잔주름처럼 나타났다가는 다시 사라져버립니
다. 그리고 피들의 존재를 영원한 것에 결부시키려 하지 않
습니다.
그들은 모든 시인들이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거의 무의식
적으로, 베아트리체와 같은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시로 노
래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들은 현대의 혼탁한 강물 속에서 난파된 채 삶과 죽음
사이를 표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비춰지는 영원한 것의 영상을 동경에 가득찬 눈으로 좇는
것이 저 별에서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
입니까?
우리는 저 별들이, 고향을 잃고 방황하며 숱한 고난을 견
디어냈던 오딧세이가 물기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그 별과 똑
같은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오, 나의 천사여! 그렇게 연
민하듯이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불면의 밤에 시달리는 이 창백한 이마 속에, 부질없는 갈
망으로 인하여 늘 목이 마른 그 무엇인가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당신은 느낄 수 있습니까?
언젠가 내가 한층 더 초췌해진 얼굴로 꼼짝 않고 누워서
마지막 한 가닥 불꽃으로 말없이 타들어갈 그 밤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아니, 모를 것입니다! 당신은 도저히 상상
조차 할 수 없겠죠.
당신의 마음을 알고는 있습니다. 당신의 눈빛은 이렇게 말
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당신의 마지막 연인입니다'라고.
당신은 마리아나 엘리제, 또는 릴리아나 엘레노르로 불리웠
지만 사실은 베아트리체입니다.
나는 벌써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새삼스럽게
당신의 기품 있는 몸매와 조각 같은 미모에서 그것을 찾아
낼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감미롭게 다가오기 전에 이미 내 어린 시절의 가슴
은 빨간 너도밤나무 아래에서 두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
고 저 뜨겁던 늦여름밤에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랑과 슬픔을
당신의 눈에서 읽어냈었습니다.
또 당신의 눈은 이렇게도 얘기하고 있군요.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좋아요'라고.
그것은 고귀하게 태어난 남성을 자기 앞에 무릎 꿇게하고
싶은 귀부인들의 눈에 나타나는 어설픈 연민의 눈길입니다.
남성을 노예로 만들려는 그 자만심에 가득찬 호의는 바로
욕망입니다.
그것이 사랑인가요? 그런 눈길을 내게서 거둬주십시오! 그
눈길 속에 숨겨져 있는 슬픔으로 출렁거리는 공포를 나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 당신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을 수
만 있다면...
그러나 나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 말을 듣고
미소 지으며, 당신으로 인하여 내 인생에 일어났던 갖가지
고난을 상기시키면서 우아하게 고개까지 끄덕입니다.
당신은 도도한 미소와 함께 결국에는 이렇게 묻는군요. "
저는 이제 떠나가도 될까요?"라고. 내가 결코 '그러시오'라
고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오.
야속한 사람 !